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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칼럼>"진짜 선거 승리는 합의 정치 복원이다"

윤석민 서울대언론정보학과 교수

4월은 정녕 잔인한 달인가. 흩날리는 꽃잎들 사이로 막바지 선거 유세가 어지럽다. ”내가 더럽다고? 너는 더 더럽잖아!” 이런 네거티브보다 우리 정치를 잘 축약하는 말은 없을 것이다. 우리 정치의 정권 교체는 한 세력의 성공, 유능함, 도덕성이 아니라 상대 세력의 실패, 무능, 도덕적 추락에 의존해 왔다. 바람직한 사회로의 진전과 거리가 먼 퇴행의 정치, 요행의 정치, 진창을 함께 뒹구는 정치였다. 집권 여당 전직 시장들의 성추행에서 시작된 이번 보궐선거도 마찬가지다.

이런 정치에 기대를 걸 수 있을까. 이 같은 상념이 밀려올 때면 정치에 대한 희망 회복 차원에서 돌아보는 책이 있다. 정치학자 린드블롬(C. Lindblom)의 ‘정책결정과정(The Policy-making Process)’이다.

책을 처음 접한 건 1990년대 후반, 가슴 뜨겁던 초년 교수 시절이다. 열병을 앓듯 80년대를 보내며 정치민주화를 이루었지만, 팍팍한 삶, 사회 곳곳의 후진적 권위주의, 지도층의 부도덕, 약자에 대한 차별, 부실한 교육, 저질 방송 등이 여전하던 시절이었다. 실망스러운 정치 대신 전문성에 기반한 정책이 대안이라 여기며 찾아든 책이었다.

하지만 책의 내용은 기대를 벗어난 것이었다. 그 핵심 요지다. ‘전문적인 연구와 분석은 사회문제의 해법일 수 없다. 오류투성이에, 너무 느리고 비용이 크며, 가치 내지 이념이 결부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보다 낳은 사회를 만드는 결정은 정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결국 또 정치인가.” 이런 탄식을 예상한 듯 저자는 말한다. ‘정치 집단은 본질적으로 사익을 앞세우는 파당(partisan)이며 심지어 정책 사안에 대해 무지하다. 그럼에도 이들은 정치적 조정과 합의를 통해 최선의 정책을 구현한다. 전문적 연구와 분석이 빛을 발하는 것도 이 과정을 통해서다.’

혼란스러웠다. 성공적인 정책의 토대가 전문적인 연구·분석에 앞서 정치라니. 게다가 이기적이고 무지한 파당들이 그 주체라니. 우둔한 필자가 이러한 성찰의 의미를 이해하고, 더 나아가 도덕적 우월성을 앞세우는 정치야말로 참담한 실패로 귀결된다는 역설을 깨달은 것은 상당한 세월이 흘러서다.

4.7 서울시장 재·보궐선거 공식 선거운동 첫날인 3월 25일  서울 송파구 오륜동에서 시민들이 서울시장 후보들의선거벽보를 보고있다. /뉴시스
4.7 서울시장 재·보궐선거 공식 선거운동 첫날인 3월 25일 서울 송파구 오륜동에서 시민들이 서울시장 후보들의선거벽보를 보고있다. /뉴시스

우리 정치가 반복해온 실패, 특히 현 문재인 정부와 70~80년대 민주화운동 세력의 실패가 이에 다름 아니었다. 이들은 순수함, 열정, 희생을 앞세운 정치 세력이었다. 민주주의는 자신들과 다른 집단들 사이(이를테면 최장집 교수가 말한 촛불과 태극기 사이)가 아닌 자신들 내부에 존재한다고 믿고, 자신들의 신념에 반하는 가치들을 적폐로 몰며 개혁을 밀어붙였다.


그렇게 4년이 흘렀다. 국가 안보, 코로나 백신, 검찰 개혁, 부동산 대책, 탈원전, 언론 통제 시도 등 눈이 닿는 모든 영역에서 국정은 표류하고 있다. 눈사태처럼 무너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하성, 조국, 김상조, 박주민 등등 도덕의 화신을 자처하던 권력 핵심 인사들의 위선적 속내도 꼬리에 꼬리를 물며 밝혀지고 있다.

이 같은 국정의 파탄이 전문적인 연구와 분석의 부족에 기인한 것은 아닐 것이다. 현 집권 세력만큼 연구·분석을 강조한 집단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의 도덕적 추락이 실패의 결정적 원인이라고도 보지 않는다. 그 양상이 더없이 참담하지만 이들 역시 여느 정치 세력처럼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집단임이 드러났을 뿐이다.

린드블롬의 성찰을 돌아볼 때, 현 집권 세력, 더 나아가 우리 정치가 실패해 온 근본 원인은 합의 정치를 배척했기 때문이다. 최선의 정책은 전문성이나 도덕적 우월성이 아닌, 정치적 조정과 합의가 만들어내는 집단 지성에 기반한다는 사실을 간과해 온 것이다. 이러한 성찰에 기초할 때, 총체적 붕괴 양상을 보이는 국정 위기의 해결책은 그 어떤 새로운 정책 대안, 그 어떤 도덕적 반성과 참회의 다짐에 앞서, 합의 정치의 복원에서 찾아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낙연 여당 선거대책위원장이 했다는 “서울시 시의원 109명 중 101명이 민주당” 발언은 그 의도가 무엇이건 우리 정치가 안고 있는 문제의 핵심을 찌른 것이었다. 선거에서 승리한들 파당 간의 협력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간절한 마음으로 호소한다. 남은 이틀의 선거운동만이라도 합의 정치의 싹을 짓밟는 네거티브 공세를 중단하자. 누가 승리하건 결과에 기꺼이 승복하며 승자의 정책적 성공을 위해 힘을 합치겠다고 선언하자. 그것이 선거를 진정한 승리로 이끄는 길이다. 그것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다. 잔인한 4월은 찬란한 희망의 달로 다시 피어나야 한다.